2010년 3월 30일 화요일

앱스토어 환불관련

올해초 아이폰을 구입한 문모씨(33)는 최근 앱스토어에서 사진 관련 애플리케이션(0.99달러)을 내려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가격의 다른 애플리케이션을 구매했다. 하지만 그가 나중에 받아든 카드사용 요금청구서에는 사진 관련 애플리케이션 구입내역 1건과 함께 1.98달러의 구매 내역 1건이 기록돼 있었다. 1.98달러에는 나중에 산 애플리케이션과 함께 앞서 구매한 사진 애플리케이션이 추가로 합산돼 있었다. 사진 애플리케이션이 이중 결제된 것이다. 하지만 카드사에 문의결과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스마트폰 확산으로 애플리케이션 구매가 늘고 있는 가운데 문씨처럼 이중 결제 등으로 인한 애플리케이션 환불을 원하는 사용자가 늘고 있다. 하지만 직접 애플과 접촉을 위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 국내 사용자 입장에선 만만한 일이 아니다.

◇환불 절차=실수로 구입했든, 시스템상의 오류가 발생했든 애플리케이션 값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애플 앱스토어의 환불(Refund) 정책을 따라야 한다.

환불 절차는 아이폰 관리 프로그램인 ‘아이튠즈’를 통해 이뤄진다. 아이튠즈 실행화면에서 계정(Account)를 클릭, ‘구매내역(Purchase History)’ 항목에 들어가면 그간 구매한 애플리케이션 목록이 나타난다. 환불 대상 애플리케이션을 클릭한 뒤 ‘문제 알리기(Report Problem)’를 선택하면 대분류의 사유들이 등장한다.

 

실수로 결제가 이뤄진 경우에는 ‘이 애플리케이션을 무심코 잘못 구매했다(I inadvertently purchased this application)’는 항목을 선택한 뒤 아래 빈칸에 간단하게 실수로 잘못 결제하게 된 내용을 추가해주면 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관련 내용이 접수되면 애플 측으로부터 48시간 안에 회신하겠다는 메일이 날라온다. 하지만 이는 사용자의 부주의 때문이란 점 때문에 환불이 승인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면 제품 구동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환불 가능성이 높다. 이 때는 ‘이 애플리케이션이 기대와 달리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This application does not function as expected)’는 항목을 클릭한 뒤 해당 내용을 정확하게 기술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추가내용을 요구받기도 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몇일 안에 환불해 주겠다는 메일이 전해진다.

◇영어 잘해야 환불도 쉬워=하지만 모든 절차가 영어로 이뤄진다는 점은 익숙치 않은 이용자들에게 적잖은 부담이 된다. 비록 간단한 단어를 조합한 문장으로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지만 애플 측으로부터 구체적인 사유를 원하는 추가 메일이 전해지면 난감해지기 십상이다.

이쯤되면 사용자는 대부분 지불액이 0.99∼2.99달러의 소액이라는 점을 두고 포기를 고민하게 된다. 카드결제 내역을 꼼꼼히 살피지 않는 사용자는 이중결제된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판매자인 KT가 지원해야=앱스토어와 관련해서는 아이폰의 국내 공급사인 KT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없다. 앱스토어의 애플리케이션 등록과 승인, 판매 등 일련의 절차는 모두 애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유통사로서 환불절차 공지와 사례별 샘플 안내 등 가능한 범위에서 지원이 필요하다는게 아이폰 사용자들의 목소리다.

문씨는 “신용카드 청구서를 받고 나서야 이중결제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영어로 환불요청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며 “국내 판매사인 KT가 이 같은 불만 접수를 대행하는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각 사례별로 영어로 작성된 메뉴얼을 만들어 고객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정환기자 victolee@etnews.co.kr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배스보트를 타기위한 서류들

1. 보트면허취득(해양경찰청)

2. 트레일러 면허취득(자동차운전면허)

3. 보트구입

4. 트레일러 제작등록증(자동차제작등록처)

4. 보트등록(해양경찰청등록후 관할구청번호판수령)

5. 보트 트레일러등록(국토해양부등록후 관할구청에서 트레일러넘버취득)

 

위 등록과정을 맞치는 데 들어가는 수수료가 대충250~300정도 들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정말 힘들지요....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맑스의 임금, 가격, 이윤에 대해

카를 마르크스 (1865)

임금·가격·이윤

1

웨스턴 씨의 주장은 사실 다음 두 가지 전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첫째로 국민 생산물의 총량은 고정된 것, 수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불변의 양 또는 크기라는 것, 둘째로 실질 임금의 총액, 다시 말해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양으로 측정되는 임금의 총액고정액, 불변의 크기라는 것이다.

그의 첫째 주장은 명백히 오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생산물의 가치와 양은 해마다 늘어나며, 국민 노동의 생산력도 해마다 늘어나고, 이 늘어나는 생산물을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화폐량도 끊임없이 변한다. 한 해를 두고 볼 때, 또는 여러 해를 서로 비교해 볼 때 옳은 것은 한 해의 하루하루를 두고 볼 때도 옳다. 국민 생산의 총량이나 크기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변하며, 인구 변동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자본 축적노동 샌산력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 갑자기 전반적 임금률상승한다 해도 이 상승은 그것이 잠재적 결과가 어떠하든간에 그 자체가 생산량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 상승은 우선 현존 사태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임금 인상 이전에 국민 생산이 고정적이 아니고 가변적이었다면 임금 인상 뒤에도 그것은 계속 고정적이 아니고 가변적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 생산량이 가변적이 아니라 불변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 친구 웨스턴 씨가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근거 없는 주장이 될 것이다. 예컨대 8이라는 숫자가 주어져 있다고 할 때 이 숫자의 절대적 한계 때문에 그 구성 부분의 상대적 한계가 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윤이 6이고 임금이 2라면 임금이 6으로 늘어나고 이윤이 2로 줄어든다 해도 총량은 여전히 8이다. 생산 총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임금 총액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 친구 웨스턴 씨는 어떻게 이 불변성을 증명하고 있는가? 그것을 단지 주장함으로써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 측면에서 모두 보아야 하는데 그는 한 측면만으로 몰아가고 있다. 임금 총액이 불변의 크기라면 그것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일시적으로 임금 인상을 관철하려는 노동자들의 행동이 어리석다면 일시적으로 임금 인하를 관철하려는 자본가들의 행동도 이에 못지않게 어리석을 것이다. 우리 친구 웨스턴 씨도 어떤 상황에서는 노동자가 임금 인상을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임금 총액은 그 본성에서 볼 때 고정된 것이므로 반작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또 자본가들이 임금 인하를 관철할 수 있으며, 사실상 끊임없이 그렇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임금 불변의 원리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에 못지않게 이 경우에도 당연히 반작용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나 행동에 대해 노동자가 대항하는 것은 정당하다. 따라서 노동자가 임금 인상을 관철하려고 행동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임금을 낮추려는 데 반대하는 모든 반작용은 임금을 올리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웨스턴 씨 자신의 임금 불변의 원리에 따르더라도 노동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임금 인상을 위해 단결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 결론을 부정한다면 그는 이 결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전제도 폐기해야 한다. 그는 임금 총액이 불변의 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설사 임금이 오를 수도 없고 올라서도 안 된다고 하더라도 자본이 내리려고 할 때는 언제든지 임금은 내릴 수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자본가가 여러분에게 고기 대신에 감자를, 밀 대신에 귀리를 먹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의 뜻을 정치경제학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복종해야 한다. 만약 어느 한 나라의 임금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면, 예컨대 미국의 임금률이 영국보다 높다면 여러분은 이 임금률의 차이를 미국 자본가와 영국 자본가의 의지의 차이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분명 경제 현상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현상에 대한 연구를 아주 단순화하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미국 자본가의 의지가 영국 자본가의 의지와 다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의지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 목사라면 내게 하나님이 프랑스에서 바라는 것과 영국에서 바라는 것이 다르다고 말할지 모른다. 내가 그에게 이 의지의 이중성을 설명하기를 요구한다면 그는 뻔뻔스럽게도 나에게 하나님은 프랑스에서는 이런 의지를, 영국에서는 저런 의지를 가진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친구 웨스턴 씨는 분명 모든 추론을 그렇듯 완전히 부정하는 주장을 펼 사람은 결코 아니다.

자본가의 의지는 확실히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얻으려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자본가의 의지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 힘의 한계, 이 한계의 성격을 구명하는 것이다.


2

웨스턴 씨가 우리에게 한 연설 내용은 간명하게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추론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으로 하여금 화폐 임금 형태로 4실링 대신에 5실링을 지불하도록 한다면, 자본가는 상품 형태로 5실링의 가치 대신에 4실링의 가치를 되돌려 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 임금이 오르기 전에 4실링으로 산 것만큼을 사려면 이제 5실링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왜 이렇게 되는가? 왜 자본가는 5실링 대신에 4실링의 가치만을 되돌려 주게 되는가? 왜냐하면 임금 총액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이 총액은 4실링의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고정되어 있는가? 왜 3실링이나 2실링, 또는 다른 액수의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만약 임금 총액의 한계가 자본가의 의지나 노동자의 의지와 관계없는 어떤 경제 법칙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면, 웨스턴 씨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법칙을 기술하고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어진 모든 순간에 실제로 지불되는 임금 총액은 언제나 필요한 임금 총액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결코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 다른 한편, 만약 임금 총액의 한계가 자본가의 단순한 의지 또는 탐욕의 한계에 바탕을 두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의적인 한계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것이 전혀 없다. 그것은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의지와 반대로도 변할 수 있다.

웨스턴 씨는 자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예증했다. 즉, 몇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의 수프가 그릇에 담겨 있다고 할 때 숟가락의 크기를 늘린다고 해서 수프의 양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예증이 좀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게 메네니우스 아그립파가 사용한 비유를 어느 정도 연상시켰다. 로마의 평민들이 로마 귀족을 반대하여 파업했을 때 귀족인 아그립파는 그들에게 국가라는 신체의 수족인 평민을 그 배[腹]인 귀족이 먹여 살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그립파는 어떤 사람의 배를 채움으로써 다른 사람의 수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입증하지 못했다. 웨스턴 씨로서는, 노동자들이 먹게 되는 그릇은 국민 노동의 모든 생산물로 채워져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그릇에서 노동자들이 더 많은 내용물을 떠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릇이 작기 때문이라거나 내용물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숟가락이 작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어떤 속임수를 써서 자본가는 5실링 대신에 4실링의 가치를 되돌려 줄 수 있는가? 그가 파는 상품의 가격을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상품 가격의 상승,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상품 가격의 변동, 상품 가격 자체는 단지 자본가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이 의지를 실현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장 가격의 오르내림, 그 끊임없는 변동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노동 생산력에서도, 사용된 자본과 노동의 양에서도, 또는 생산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화폐 가치에서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단지 임금률만이 변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이 임금 인상상품 가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오직 이들 상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 간의 실제 비율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전체로 볼 때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소득을 생활 필수품을 사는 데 쓰며,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므로 임금률이 전반적으로 오르는 것은 생활 필수품에 대한 수요를 늘리고, 따라서 그 시장 가격을 올리게 될 것이다. 이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들은 임금 인상을 이들 상품의 시장 가격을 올림으로써 보상받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지 않는 다른 자본가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자본가들이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국민 생산물의 2/3를 1/5의 인구가 소비---하원 의원 한 사람은 그 수치가 최근 인구의 1/7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국민 생산물 가운데 얼마나 막대한 부분이 사치품의 형태로 생산되거나 사치품과 교환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얼마나 막대한 양이 하인·말·고양이 따위에 낭비 될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러한 낭비는 늘 생활 필수품의 가격이 오름으로써 크게 제한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지 않는 자본가들의 처지는 어떠한 것인가? 이들은 전반적인 임금 인상의 결과로 생긴 이윤율 하락 부분을 그들 상품의 가격을 올림으로써 보충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상품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득은 줄어들 것이며, 이 줄어든 소득에서 그들은 가격이 오른 생활 필수품을 같은 양만큼 사는 데 더 많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소득이 줄어듦에 따라 사치품에 대한 그들의 지출은 줄어들게 되며, 따라서 그들 각각의 상품에 대한 서로간의 수요도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수요가 줄어듦으로써 상품 가격도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산업 부문에서 이윤율은 임금률의 전반적 상승에 단순 비례하여 낮아질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임금 인상, 생활 필수품의 가격 상승, 그리고 사치품의 가격 하락 등에 복합 비례하여 낮아질 것이다.

다양한 산업 부문에 투여된 자본에 대한 이러한 이윤율의 차이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물론 어떠한 이유에서는 생산 부문에 따라 일반 이윤율이 달라지게 되는 경우라면 언제나 일반적으로 생겨나는 그러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자본과 노동은 수익성이 적은 부문에서 더 큰 부문으로 옮아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이전 과정은, 어떤 산업 부문에서는 늘어난 수요에 비례하여 공급이 늘어날 때까지, 또 어떤 산업 부문에서는 떨어진 수요에 맞추어 공급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전반적 이윤율은 또다시 다양한 부문에서 균등해질 것이다. 모든 교란은 원래 다양한 상품들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비율이 변하는 데서 일어난 것이므로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멈추게 되며, 가격도 이전의 수준과 평형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임금 인상의 결과로 생긴 이윤율의 하락은 일부 산업 부문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반적인 것이 된다.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노동 생산력이나 총생산량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생산량이 그 형태만 바꾼 것이다. 즉, 생산물 가운데서 생활 필수품 형태로 존재하는 부분이 더 많아지며 사치품 형태로 존재하는 부분이 더 적어질 것이다. 또는 결국 마찬가지가 되겠지만, 외국의 사치품과 교환되어 사치품 본래의 형태로 소비되는 부분이 더 적어지든가, 아니면 결국 또 마찬가지가 되겠지만 국내 생산물 가운데서 외국의 사치품 대신에 외국의 생활 필수품과 교환되는 부분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률의 전반적인 상승은 시장 가격을 일시적으로 교란한 뒤 전반적인 이윤율 하락만을 빚을 뿐 상품 가격을 영속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누가 내게 앞서의 주장에서는 모든 임금 증가분이 생활 필수품에 지출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세운 가정이 웨스턴 씨의 견해에 가장 유리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임금 증가분이 이전에는 노동자의 소비 영역에 속하지 않았던 품목에 지출된다면, 이들의 구매력은 실지로 늘어남은 증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늘어난 구매력은 오로지 임금 인상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본가의 구매력 감소와 정확하게 일치해야 한다. 따라서 상품에 대한 총수요늘어나지 않고 수요의 구성 부분이 변할 것이다. 한쪽에서의 수요 증가는 다른 쪽에서의 수요 감소로 상쇄될 것이다. 이와 같이, 총수요는 변하지 않으며 상품의 시장 가격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즉, 임금 증가분이 모든 소비품에 균등하게 지출되는가---이 경우 노동자 계급측의 수요 확대는 자본가 계급측의 수요 감소로 보충되어야 한다.---아니면 임금 증가분이 일부 품목에만 지출되어 그 시장 가격을 일시적으로 올릴 뿐인가---이 경우 그 결과 일어나는 일부 산업 부문의 이윤율 상승과 다른 산업 부문의 이윤율 하락은 자본과 노동의 분배에 변동을 일으키며, 이 변화는 공급이 한 산업 부문의 늘어난 수요에 맞추어 끌어올려질 때까지, 그리고 다른 산업 부문의 줄어든 수요에 맞추어 끌어내려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하는 것이다. 앞의 가정에서는 상품 가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뒤의 가정에서는 시장 가격이 약간 동요하고 난 뒤에 상품의 교환 가치는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어떠한 가정을 하건 모두 전반적인 임금률의 상승은 결국 전반적인 이윤율 하락 외에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웨스턴 씨는 영국 농업 임금이 9실리에서 18실링으로 전반적으로 올라 빚어지는 여러 어려움을 생각해 보도록 여러분에게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생활 필수품의 엄청난 수요 증가와 이에 따른 끔찍한 가격 상승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여러분도 모두 알다시피, 미국 농업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영국 농업 노동자의 2배 이상에 달하는 데도 농업 생산물의 가격은 영국보다 미국이 싸고 자본과 노동 간의 일반적 관계는 영국만큼 미국에서도 통용되며, 연간 생산량은 영국보다 미국이 훨씬 적다. 그렇다면 왜 우리 친구는 이처럼 경종을 울리고 있는가? 단지 우리 앞에 놓인 현실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다. 임금이 9실링에서 18실링으로 갑작스레 오르면 졸지에 100%가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영국의 전반적인 임금률이 갑자기 100% 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상의 폭은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실제적 경우에서도 주어진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며 또 거기에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논구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단 1%라 할지라도 임금률이 전반적으로 오르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다.

100% 인상이라는 웨스턴 씨의 허황한 예는 집어치우고, 나는 1849년에서 1859년 사이에 그레이트 브리튼에서 일어났던 실제 임금 인상에 여러분이 주목하기를 제안하는 바다.

여러분은 모두 1848년 이래 도입된 10시간 노동법안, 더 정확하게는 10시간 반 노동법안에 대해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목격했던 가장 큰 경제적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일부 지방 산업에서가 아니라 영국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선도적 산업 분야에서 일어난 갑작스럽고도 강제적인 임금 인상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임금 인상이었다. 유어 박사, 시니어 교수, 그리고 그 밖의 중간 계급[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공식적인 경제학 대변자들은 그 법안이 영국 공업에 조종을 울릴 것이라고 증명했으며, 그들이 증명한 바는 우리 친구 웨스턴 씨보다 훨씬 확실한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이 단순한 임금 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노동량이 줄어들어 생기며, 또 이에 근거를 둔 임금 인상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자본가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열두 번째의 한 시간이 바로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뽑아 가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축적 감소, 물가 상승, 시장 상실, 생산 위축, 또 그 결과로 임금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고 마침내 파멸이 올 것이라고 위협했다. 사실 이들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 F. M Isidore de Robespierre>의 최고 가격법도 이 법안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노동일이 줄어들었는데도 공장 직공의 화폐 임금이 오르고 공장 고용자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생산물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노동 샌산력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상품 판매 시장이 유례없이 점점 넓어진 것이었다. 1861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과학 진흥 협회의 회합에서 나는 뉴먼(Newman) 씨가 자신과 유어 박사, 시니어, 그밖의 모든 공식적인 경제학 대표자들이 틀렸으며 인민의 본성이 옳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사람은 프랜시스 뉴먼 교수가 아니라 W. 뉴먼 씨다. 왜냐하면 그는 1793년에서 1856년까지의 가격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토머스 투크(Thomas Tooke) 씨의 훌륭한 저서 『가격의 역사』의 협력자이자 공동 편집자로서 경제학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친구 웨스턴 씨의 고정 관념, 즉 고정된 임금 총액, 고정된 생산량, 고정된 노동 생산력 수준, 고정된 자본가의 의지, 그 밖에 그가 말하는 모든 고정 관념이 옳다면, 시니어 교수의 비탄에 찬 예언은 옳은 것이 되고 한편, 이미 1816년에 노동일의 전면적 제한을 노동 계급의 해방의 예비적 첫걸음이라고 선언하면서 실제로 이 일반적인 편견을 무릅쓰고 뉴라나크의 자기 방적 공장에서 노동일의 제한을 자력으로 실시했던 로버트 오언은 옳지 못했던 것이다.

10시간 노동법안이 시행되고 그 결과 임금이 올랐던 바로 그 기간에 영국에서는, 여기서 일일이 들어 놓을 필요가 없는 이유들 때문에, 농업 임금의 전반적 상승이 일어났다.

나의 당면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필요하지 않지만 여러분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몇 마디해 두고자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당 2실링의 임금을 받다가 4실링으로 임금이 올랐다면 임금률은 100% 오른 것이 된다. 임금률의 상승이라는 면에서만 본다면 이는 엄청난 것이겠지만, 주당 4실링이라는 실제 임금액은 여전히 비참하기 짝이 없는 기아 임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마어마한 임금의 퍼센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언제나 원래 임금액이 얼마였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약 10명이 주당 2실링씩 받고, 5명이 주당 5실링씩, 또 5명이 주당 11실링씩을 받는다면, 합쳐서 20명이 주당 100실링 또는 5파운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 뒤 이들의 주당 임금 총액이 예컨대 20% 오른다면 임금 총액은 5파운드에서 6파운드로 오를 것이다. 사실상 10명의 임금은 그대로이고 한 쪽 5명의 임금이 겨우 각각 5실링에서 6실링으로 오르고 다른 쪽 5명의 임금 총액이 55실링에서 70실링으로 올랐다고 하더라도 평균해서 전반적인 임금률은 20% 올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의 절반이 자신들의 처지를 전혀 개선하지 못했고, 1/4은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개선했을 뿐이며, 겨우 1/4만이 실질적으로 나아진 것이다. 그래도 역시 평균으로 계산하면 20명의 임금 총액은 20% 오른 것일 뿐더러, 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총자본과 이들이 생산하는 상품 가격 면에서 본다면 마치 이들 모두가 평균적인 임금 인상에서 균등한 몫을 가지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게 된다. 농업 노동의 경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등 주마다 표준 임금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임금 인상이 이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불균등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임금 인상이 일어났던 기간중에는 러시아 전쟁에 따른 새로운 조세, 농업 노동자 주택의 대량 파괴 등과 같이 임금 인상의 효과를 없애는 여러 힘이 작용했다.

서두는 이쯤 해 두고 이제 1849년에서 1859년까지 영국의 평균 농업 임금률이 약 40% 올랐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내 주장을 입증하려고 여러분에게 수많은 자료를 상세하게 제시할 수도 있으나 당장의 목적을 위해서는 1860년에 고(故) 모튼 씨가 런던 공예 협회에서 제시한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보고, '농업에서 사용되는 힘'을 여러분에게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모튼 씨는 스코틀랜드의 12개 주와 잉글랜드의 35개 주에 사는 약 100명의 농부에게서 수집한 계산서와 그 밖에 믿을 만한 문서를 가지고 이 보고서를 만들었다.

우리 친구 웨스턴 씨의 견해에 따르면, 공장 직공의 임금이 동시에 오른 것을 모두 합칠 경우 1849년에서 1859년까지의 기간에는 농업 생산물 가격이 폭등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러시아 전쟁, 그리고 1854년에서 1856년까지 계속된 흉작에도 영국의 주요 농산물인 밀의 평균 가격은 1838년에서 1848년 사이에 쿼터당 약 3파운드이던 것이 1849년에서 1859년 사이에는 쿼터당 약 2파운드 10실링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농업 임금이 평균 40% 넘게 오른 동시에 밀 가격은 16% 넘게 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같은 기간에, 그 마지막 해인 1859년과 첫해인 1849년을 비교해 보면 공식 극빈자가 93만 4419명에서 86만 470명으로, 7만 3949명이 줄어들었다. 매우 적게 줄어들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또 그 뒤 몇 년 동안 다시 줄어들지 않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줄어들었다.

곡물법이 폐지된 결과, 외국 곡물 수입량은 1838~1848년에 비해 1849~1859년에 2배 이상 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웨스턴 씨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듯 외국 시장에 대한 급작스럽고도 막대한, 그리고 끊임없이 늘어나는 수요로 틀림없이 그 지역의 농산물 가격이 엄청나게 뛰어오를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요 증대의 효과는, 그 수요가 외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던가? 흉작을 입은 몇 년을 뺀다면 이 기간 내내 프랑스에서는 곡물 가격의 파멸적인 하락이 연설의 고정 주제가 되었고,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잉여 생산물을 여러 차례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러시아는, 어커트 씨의 말을 믿는다면, 유럽 시장에서 러시아의 농산물 수출이 양키와의 경쟁으로 잠식되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남북 전쟁을 부추겼던 것이다.

웨스턴 씨의 주장을 추상적 형태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모든 수요 증가는 언제나 생산량을 기초로 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요 증가는 수요 물품의 공급은 결코 늘릴 수 없고 단지 그 화폐 가격만을 높일 수 있을 이다. 그런데 아주 일상적으로 관찰해 봐도 알 수 있듯이, 수요 증가는 경우에 따라 상품의 시장 가격을 일시적으로 오르게 하여 공급이 늘어나게도 하지만, 이 경우에 결국 가격은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거나 대개는 이전 수준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수요 증가는 임금 인상에서 생겨나든, 또는 다른 어떤 이유에서 생겨나든간에 이 일반적인 현상도 임금 인상이라는 예외적인 사정 밑에서 일어나는 현상만큼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우리가 다르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특별한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수요 증가가 궁극적인 시장 가격 상승 대신에 공급 증가만을 가져온다는 법칙을 설명하는 데서 그가 놓인 곤경만을 표현해 주었을 뿐이다.


3

토론 둘째 날에 우리 친구 웨스턴 씨는 자신의 이전 주장을 새로운 형식으로 포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임금이 전반적으로 오르면 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데 더 많은 통화가 필요해질 것이다. 통화량은 고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 고정된 통화량으로 늘어난 화폐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가? 이전에는 노동자의 화폐 임금이 올랐는데도 그에게 돌아가는 상품의 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데 어려움이 잇었으나, 이제는 상품의 양이 고정되어 있는데도 화폐 임금은 올랐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물론 여러분이 애초에 그가 주장했던 독단을 거부한다면 그의 두 번째 불만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통화에 관한 문제는 우리의 주제와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다.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지불 기구가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훨씬 완벽하다. 은행 제도가 대규모이고 집중되어 있는 탓으로, 같은 액수의 가치를 유통시키기 위해, 그리고 같거나 더 많은 양을 거래하기 위해 필요한 통화량이 훨씬 적어도 된다. 예컨대 임금에 관한 한 영국의 공장 직공은 자신의 임금을 매주 상점 주인에게 지불하고, 상점 주인은 그것을 매주 은행업자에게 보내며, 은행업자는 또 그것을 매주 공장주에게 돌려주고, 이 공장주는 또다시 그것을 자신의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식이다. 이와 같은 장치에 의해 한 직공의 연간 임금, 이를테면 52파운드는 단 한개의 소브린화(貨)가 매주 순환을 되풀이함으로써 지불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불 기구는 잉글랜드에서조차도 스코틀랜드에서보다는 완벽하지 못하며 어디서나 같은 정도로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어 일부 농업 지역에서는 공장 지역에 비해 훨씬 적은 액수의 가치를 유통시키는 데에도 훨씬 많은 통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영국 해협을 건넌다면, 여러분은, 독일·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화폐 임금이 훨씬 적지만 그 화폐 임금을 유통시키는 데 훨씬 많은 액수의 통화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같은 소브린화가 그토록 신속하게 인행업자에게 흡수되거나 산업 자본가에게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연간 52파운드를 유통시키는 데 1소브린화가 필요한 대신에 연간 25파운드의 임금을 유통시키는 데 아마도 3소브린화가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이 대륙의 나라들과 영국을 비교해 보면 여러분은 낮은 화폐 임금이 높은 화폐 임금보다 훨씬 많은 통화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우리의 주제와는 매우 낯선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라는 점을 곧바로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계산에 의하면, 이 나라 노동자 계급의 연간 소득은 2억 5000만 파운드로 평가된다. 이 막대한 금액이 약 300만 파운드로 유통된다. 임금이 50% 오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300만 파운드가 아니라 450만 파운드의 통화량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자의 일상 경비는 대부분 은화와 동화(銅貨)로, 다시 말해 불환 지폐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금화에 대한 상대적 가치가 법률로 고정되어 있는 명목 화폐로 지출될 것이므로 화폐 임금의 50% 인상은 극단적인 경우, 예컨대 10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소브린화가 더 유통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잉글랜드 은행이나 시중 은행의 지하 금고에 금덩이나 주화의 형태로 잠자고 있는 100만 파운드가 유통될 것이다. 그러나 이 100만 파운드의 추가 주조 또는 추가 마모로 생기는 사소한 지출조차도 절약될 수 있을 것이며, 추가 통화량이 결핍되어 조금이라도 마찰이 일어난다면 실제로 절약될 것이다. 여러분은 모두 영국의 통화가 크게 두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종류는 각종 은행권으로 공급되는 것으로서 상인들 사이의 거래나 소비자가 상인에게 한층 거액을 지불할 때 사용되며, 다른 종류의 통화는 금속 주화로서 소매 거래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 두 종류의 통화는 서로 구분되지만 함께 얽혀서 사용된다. 그래서 금화는 큰 금액을 지불할 때 5파운드 이하의 모든 우수리를 처리하는 데서도 매우 널리 유통되고 있다. 만일 내일이라도 4파운드나 3파운드, 2파운드 은행권이 발행된다면 이 유통로를 채우고 있는 금화는 곧 여기서 빠져 나와 화폐 임금의 상승 때문에 그것을 요구하는 통로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이와 같이 50%의 임금 인상으로 추가로 요구되는 100만 파운드는 소브린화를 하나도 추가하지 않아도 공급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랭커셔에서 꽤 오랫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은행권을 한장도 추가하지 않고 환어음 유통을 늘림으로써 이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웨스턴 씨가 농업 임금에서 실제로 일어난다고 가정한 바 있듯이 예컨대 100%의 전반적인 임금률 상승으로 생활 필수품 가격이 폭등한다면, 또 그의 견해대로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추가 통화량을 요구한다면 전반적인 임금 하락도 반대 방향에서 같은 규모로 같은 결과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좋다! 여러분은 모두 1858년에서 1860년까지는 면방직 공업이 가장 번창한 시기였다는 사실, 그리고 특히 1860년은 이 점에서 상업의 역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이와 동시에 그 밖의 모든 산업 부문도 가장 번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면방직 공업 직공과 이 비문과 연관된 그 밖의 모든 노동자의 임금은 1860년에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런데 미국의 위기가 닥쳐오면서 임금 총액은 갑자기 이전의 약 1/4 수준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이것은 반대 방향에서 보면 400 % 오른 셈이다. 만약 임금이 5에서 20으로 오르면 300% 올랐다고 할 수 있으며, 20에서 5로 떨어진다면 75%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의 상승액과 뒤의 하락액은 15실링으로 변함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임금률이 전례 없이 크게 변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면방직 공업에 직접 종사하는 직공뿐만 아니라 여기에 간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든 직공들을 합한다면, 이것은 공업 노동자 수의 1배 반이나 되는 직공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밀의 가격은 떨어졌는가? 그것은 오히려 1858년에서 1860년까지의 3년간 쿼터당 연 평균 47실링 8페니였던 것이 1861년에서 1863년까지의 3년간에는 쿼터당 연 평균 55실링 10페니로 올랐다. 통화량을 보면 1860년에는 337만 8102파운드, 1861년에는 867만 3232파운드가 조폐국에서 주조되었다. 다시 말해 1860년에 비해 1861년에는 529만 5130파운드가 더 많이 주조되었다. 사실 유통된 은행권은 1860년에 비해 1861년에는 131만 9000파운드가 적었다. 이 액수를 빼보자. 그래도 여전히 번영의 해인 1860년에 비해 1861년의 통화량 증가분은 397만 6130파운드, 즉 약 400만 파운드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은행의 금 보유량도 이와 동시에 똑같은 비율은 아니지만 이에 가까운 비율로 줄어들었다.

1862년을 1842년과 비교해 보자. 유통된 상품의 가치와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사실은 접어두고라도 1862년,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철도의 주식이나 채권 등을 정규적으로 거래하는 데서 지불된 자본만 해도 3억 2000만 파운드에 이르렀는데, 이 금액은 1842년만 하더라도 믿기지 않는 액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1862년과 1842년의 총통화량은 거의 같았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여러분은 삼품 가치뿐 아니라 화폐 거래 가치가 엄청나게 커진다 해도 통화량은 차츰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친구 웨스턴 씨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만약 그가 이 문제를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도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 즉 임금은 접어두고라도, 또는 임금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유통되는 상품의 가치와 양 및 일반적으로 결제되는 화폐 거래액은 날마다 변동한다는 점, 발행된 은행권의 액수도 날마다 변동한다는 점, 화폐를 전혀 매개로 하지 않고 환어음·수표·장부상의 대변·어음 교환소 등의 수단을 통해 실현되는 지불액도 날마다 변동한다는 점, 실제로 금속 통화가 필요한 경우에도 유통되는 주화와 저장되어 있거나 은행 지하 금고에서 잠자고 있는 주화와 금덩이 간의 비율도 날마다 변동한다는 점, 국내 유통을 통해 흡수되는 금의 양과 국제 유통을 위해 홰외로 반출되는 양도 날마다 변동한다는 점 등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는 통화량 불변이라는 자신의 독단이 일상의 움직임과 마지 않는 엄청난 오류라는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는 통화 법칙에 대한 자신의 그릇된 이해를 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렇듯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 통화가 적응하도록 하는 법칙들을 논구해야 했을 것이다.


4

우리 친구 웨스턴 씨는 라틴어 격언인 반복은 학문의 어머니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그의 당초의 독단을 새로운 형식으로 되풀이하여, 임금 인상의 결과로 생기는 통화량의 수축은 자본의 감소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화에 관한 그의 변덕은 이미 다루었으므로 나는 그가 멋대로 꾸며 낸 통화 재난으로부터 생긴다는 그 가상적인 결과를 문제삼는 것은 전혀 쓸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그토록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기는 하지만 사실은 단 하나인 그의 독단을 곧 가장 단순한 이론의 형태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무비판적인가는 한마디만 언급하면 명백해질 것이다. 그는 임금 인상, 또는 임금 인상의 결과인 높은 임금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묻겠다. 높은 임금이란 무엇이며 낮은 임금이란 또 무엇인가? 예컨대 주당 5실링은 왜 낮은 임금이며 주당 20실링은 왜 높은 임금인가? 만약 5실링이 20실링에 비해 낮은 것이라면, 20실링도 200실링에 비해서는 낮은 것이다. 만약 온도계에 관한 강의를 하는 사람이 온도가 높으니 낮으니 하고 열변을 토하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한다면 그는 아무런 지식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는 우선 빙점과 비등점이 어떻게 찾아지며, 어떻게 이 기준점들이 온도계 판매자나 제작자 마음대로가 아니라 자연 법칙에 의해 정해지는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임금과 이윤에 관해서도, 웨스턴 씨는 경제 법칙들에서 그러한 기준점들을 연역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찾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임금 또한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어떤 기준과 비교할 때에만 높거나 낮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인데도 높거나 낮다는 일반적인 뜻의 속어를 고정된 의미를 지닌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왜 특정 노동량에 대해 특정 금액이 주어지는가를 내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이것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먼저 공급과 수요 자체를 규제하는 법칙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대답은 곧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노동의 공급과 수요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이와 함께 노동의 시장 가격도 끊임없이 변한다. 소요가 공급을 넘어서면 임금은 오르며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면 임금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예컨대 파업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수요와 공급의 실태를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공급과 수요를,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인다면 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것은 유치하고도 무익한 짓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는 그 지고의 법칙을 따르면 주기적인 임금 인상은 주기적인 임금 하락만큼이나 지극히 필연적이며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공급과 수요를, 임금을 규정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왜 특정 노동량에 특정 금액이 주어지는가?

그러나 문제를 한층 폭 넓게 생각해 보자. 노동이든 다른 어떤 상품이든 그 가치가 궁극적으로 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오류일 것이다. 공급과 수요는 단지 일시적인 시장 가격의 등락만을 규제할 뿐이다. 그것은 상품의 시장 가격이 왜 그 가치 이상으로 오르는지 또 가치 이하로 떨어지는지를 설명해 줄 뿐, 가치 자체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공급과 수요가 평행을 이룬다거나, 경제학자들이 말하듯이 둘이 서로 상쇄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대립적인 힘들이 가아지는 바로 그 순간에 두 힘을 서로 상대방을 마비시켜 어느 쪽 방향으로도 작용하지 않게 된다. 공급과 수요가 서로 평형을 이루는 순간, 그래서 작용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상품의 시장 가격은 그 실제 가치와 일치하며, 시장 가격이 동요하는 중심인 기준 가격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 가치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요와 공급이 시장 가격에 끼치는 일시적인 영향은 전혀 고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임금과 그 밖의 모든 상품의 가격도 마찬가지다.


5

우리 친구의 모든 주장을 가장 단순한 이론적 표현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하나의 독단으로 귀착한다. "상품의 가격은 임금에 의해 결정되거나 규제된다."

나는 이미 논파된 이 낡아빠진 오류를 반증하려고 실제로 관찰한 바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영국의 공장 직공, 광부, 조선공 등은 노동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은데도 이들의 생산물은 다른 모든 국민들의 생산물보다 싸게 팔리는 데 반해, 예컨대 영국 농업 노동자는 노동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은데도 이들의 생산물은 다른 거의 모든 국민들의 같은 생산물보다 비싸게 팔린다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각종 제품을 서로 비교하거나 다른 나라들의 상품과 비교해 봄으로써 나는, 실제적인 예외가 아니라 외관상의 몇몇 예외를 뺀다면, 평균적으로 가격이 비싼 노동이 가격이 싼 상품을 생산하며 가격이 싼 노동이 가격이 높은 상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앞의 가격이 비싼 노동과 뒤의 가격이 싼 노동이 각각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원인임을 입증하지는 않지만, 하여튼 이것은 상품의 가격이 노동의 가격에 의해 규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입증해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경험적 방법을 쓸 필요가 전혀 없다.

혹시 웨스턴 씨가 "상품의 가격은 임금에 의해 결정되거나 규제된다."는 독단을 제시한 사실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결코 그렇게 정식화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는 노동자의 임금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과 지주의 지대도 상품 가격으로 지불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윤과 지대도 상품 가격의 구성 부분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따른다면 가격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무엇보다 임금에 의해 형성된다. 그 다음에 자본가를 위한 추가분과 지주를 위한 추가분이 가격에 합쳐진다.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임금이 10이라고 가정해 보자. 만약 이윤율이 100%라면 먼저 지불된 임금에 자본가는 10을 더할 것이며, 또 지대율도 임금의 100%라면 10이 더 덧붙을 것이므로 상품의 총가격은 30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격을 결정한다는 것은 단지 가격이 임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일 뿐이다. 위의 경우 임금이 20으로 오른다면 상품 가격은 60으로 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가격을 규정한다는 독단을 주장한 정치 경제학의 퇴물 저술가들은 모두 이윤과 지대를 임금에 더해지는 단순한 추가분으로 다룸으로써 이 독단을 입증하려 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누구도 이 추가분의 한도를 어떠한 경제 법칙으로 설명해 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윤이 전통, 관습, 자본가의 의지, 또는 그 밖의 마찬가지의 어떤 임의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방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만약 그들이 이윤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의미 없는 이야기다. 경쟁은 확실히 각 산업 부문마다 서로 다른 이윤율을 균등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 수준 자체나 일반 이윤율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품의 가격은 임금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임금이란 노동의 가격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상품의 가격은 노동의 가격에 의해 규제된다는 뜻이다. "갸격"은 교환 가치---내가 가치라고 하는 경우는 항상 교환 가치를 가리킨다.---즉 화폐로 표현된 교환 가치이므로 그 주장은 결국 다음과 같이 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또는 "노동의 가치는 가치의 일반적 척도다."

그렇다면 '노동의 가치' 자체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우리가 논리적으로 추론하려는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독단을 주창한 자들은 논리적인 고민 거리는 가볍게 넘긴다. 예컨대 우리 친구 웨스턴 씨를 보자. 애초에 그는 임금이 상품 가격을 규제하며, 따라서 임금이 오르면 당연히 가격도 오른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꾸로, 상품 가격이 오른다는 이유로, 또 임금은 사실상 그것을 지출하여 살 수 있는 상품의 가격으로 측정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임금 인상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노동의 가치가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말로 끝맺는다. 그래서 우리는 최악의 순환 논법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로 한 상품의 가치, 예컨대 노동·곡물 또는 그 밖의 어떤 상품의 가치를 가치의 일반적 척도와 규제자로 삼는다면 우리는 단지 난관을 일시적으로 피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가치를 또 다른 가치로서 결정하는데, 그 가치 또한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은 상품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독단을 가장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가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가 되는데, 이러한 동어 반복은 사실 우리가 가치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정치 경제학의 일반 법칙에 관한 모든 추론은 단지 군소리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1817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정치 경제학의 원리』에서 리카도가 "임금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해묵고 일반적인, 그리고 낡아빠진 오류를 근본적으로 깨뜨린 것은 그의 위대한 공적이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와 그의 프랑스 인 선행자[중농학파]들은 이 오류를 그들 연구의 진실로 과학적인 부분에서는 배척하면서도 한층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장(章)들에서 다시 재현해 놓았다.


6

여러분, 이제 나는 문제를 실제로 밝혀 내는 일에 착수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이 일을 충분히 만족스럽게 하겠다고는 약속할 수 없다. 그러려면 정치 경제학의 모든 영역을 섭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 인들이 말하듯이, 요점만 다룰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제기해야 할 첫번째 문제는, 상품의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상품 가치는 매우 상대적인 것으로서, 그 상품을 다른 모든 상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확정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어떤 상품의 가치, 교환 가치라고 할 때 그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과 그것이 교환되는 양적 비율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기게 된다.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우리는 이 비율들이 끝없이 다양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나의 상품, 이를테면 밀을 예로 든다면 밀 1쿼터가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은 거의 무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단·금 또는 그 밖의 어떤 상품으로 표현되든 그 가치는 늘 같은 것이므로, 이 가치는 상품들과 교환되는 여러 가지 비율과는 구별되는, 독립된 어떤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상품들과는 다양한 [교환] 등식을 하나의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내가 1쿼터의 밀이 철과 어떤 비율로 교환된다든가 아니면 밀 1쿼터의 가치가 얼마만큼의 철로 표현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밀의 가치나 철로 표현된 그 등가물이 밀도 철도 아닌 어떤 제3자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들이 같은 크기를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로 표현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밀이든 철이든 서로 상대방과는 관계없이 그것들의 공동 척도가 되는 그 제3자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을 밝히려고 매우 간단한 기하학적 예를 들어 보겠다. 온갖 형태와 크기를 갖는 삼각형의 면적을 비교할 때, 또는 삼각형을 사각형이나 그 밖의 어떤 다각항과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어떤 삼각형의 면적이든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표현으로 환원한다. 삼각형의 면적은 밑변과 높이의 곱을 반으로 나눈 것과 같다는 것을 삼각형의 성격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종류의 삼각형의 면적과 모든 다각형의 면적을 비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다각형도 몇 개의 삼각형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치에 대해서도 같은 식의 절차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상품을 모두에 공통된 하나의 표현으로 바꾸어 그 상품들에 포함된 같은 척도의 비율로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상품의 교환 가치는 단지 그것이 사회적 기능일 뿐이고 그 자연적 성질과는 전혀 관계없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모든 상품에 공통된 사회적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이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려면 일정량의 노동이 거기에 투여되거나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냥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필요를 위해, 즉 자신이 쓰려고 물품을 생산하는 사람은 생산물을 만드는 것이지 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급 자족하는 생산자로서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상품을 생산하려면, 인간은 어떤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는 물품을 생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노동 자체가 사회에 의해 지출되는 총노동량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의 노동은 사회 내의 분업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 밖의 다른 분업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보아도 다른 분업들을 통합하는 것이 요구된다.

만약 상품을 가치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오로지 체현된, 고정된, 또는 여러분이 좋으시다면 결정화(結晶化)한 사회적 노동이라는 단 하나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상품은 오직 그것이 노동량을 얼마나 나타내고 있는가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될 수 있다. 예컨대 한 장의 벽돌을 만드는 데보다는 한 장의 명주 손수건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동량이 소모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량은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노동이 지속되는 기간, 즉 시간이나 일수 등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척도를 적용하려면 모든 종류의 노동이 평균 노동 또는 단순 노동 단위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상품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노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상품 가치의 크기, 즉 그 상대적 가치의 크기는 그 속에 포함된 사회적 실체의 양이 큰가 작은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의 상대적 양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상품의 상대적 가치는 상품 속에 투여되고 체현되고 고정된 각각의 노동량 또는 노동 총량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노동 시간에 생산 될 수 있는 상품들의 상관적(korrelativ) 양은 같다. 또는, 한 상품의 가치와 다른 상품의 가치의 관계는 한 상품에 고정 되어 있는 노동량과 다른 상품에 고정되어 있는 노동량의 관계와 같다.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상품의 가치가 임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과,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상대적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사이에 그렇게 커다른 차이가 있는가, 아니 도대체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은 노동에 대한 보수와 노동의 은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예컨대 밀 1쿼터와 금 1온스에는 같은 양의 노동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이러한 예를 드는 것은 벤저민 플랭클린이 『지폐의 본성과 필요성에 관한 약간의 연구』라는 표제로 1729년에 간행한 첫 저작에서 이 예를 사용했기 때문인데, 이 책에서 그는 처음으로 가치의 참된 본성을 발견했다. 자, 이렇게 해서 밀 1쿼터와 금 1온스는 같은 양의 평균 노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즉 이들 각각에 고정되어 있는 며칠 또는 몇 주일 노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같은 가치 또는 등가물이라고 가정한다. 금과 곡물의 상대적 가치를 이와 같이 결정하는 데서 우리는 농업 노동자와 광부의 임금을 어떤 식으로든 참고해야 할 것인가? 조금도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의 하루 노동이나 주 노동이 어떻게 지불되었는가 하는 문제, 심지어 도대체 임금 노동이 고용되었는가의 여부조차도 불문에 부친다. 설혹 임금 노동이 고용되었다 하더라도 임금은 지극히 불균등했을 수도 있다. 밀 1쿼터에 자신의 노동을 체현한 노동자는 겨우 2부셀을 받는데 광산에 고용된 노동자는 반 온스의 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임금이 같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임금은 그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와는 아주 다른 다양한 편차를 보일 수 있다. 그 임금은 곡물 1쿼터 또는 금 1온스의 1/2, 1/3, 1/4, 1/5, 그 밖에 어떠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임금은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를 초과하거나 그 이상은 될 수 없지만 얼마든지 그 이하는 될 수 있다. 그들의 임금은 생산물의 가치에 의해 제한될 것이지만 그들의 생산물의 가치는 임금에 의해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예컨대 곡물과 금의 가치, 그 상대적 가치는 사용된 노동의 가치, 즉 임금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품 속에 고정되어 있는 상대적 노동량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은 노동의 가치 또는 임금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동어 반복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우리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한층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상품의 교환 가치를 계산하는 데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사용된 노동량에, 상품의 원료에 이미 들어 있는 노동량과 이러한 노동을 보조하는 설비·도구·건물에 투여된 노동량을 더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정량의 면사의 가치는 방적 과정 동안에 면화에 더해진 노동량과 면화 자체에 이미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 사용된 석탄과 기름과 그 밖의 보조물에 이미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 증기 기관·방추·공장 건물 등등에 고정되어 있는 노동량 등의 결정체다. 연장, 기계, 건물과 같은 본래 의미의 생산 도구들은 되풀이되는 생산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기간에 되풀이해서 이용된다. 만약 그것들이 원료와 같이 한꺼번에 모두 쓰여 없어져 버린다면 그 모든 가치는 한꺼번에 그것들을 써서 생산한 상품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방추와 같은 것은 조금씩 마모되므로 방추의 평균 수명과 어떤 기간, 이를테면 하루 동안의 평균 마모량에 근거를 두고 평균 계산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방추의 가치가 날마다 뽑아 내는 면사에 옮겨지는가, 즉 예컨대 면사 1파운드에 체현되어 있는 전체 노동량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양이 방추에 이미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에 해당하는가를 계산한다. 우리의 당면 목적을 위해서는 이 점을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만약 한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면 게으르거나 서투른 사람일수록 상품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의 상품은 더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여러분은 내가 '사회적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기억할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규정에는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한 상품의 가치는 그 속에 투여되거나 결정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어진 사회 상태에서, 어떤 사회적 평균 생산 조건에서, 사용된 노동의 강도와 숙련도가 평균적으로 주어져 있는 가운데에서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을 뜻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기계 직기가 수직기와 경쟁하게 되었을 때, 주어진 양의 면사를 1야드의 면포 또는 옷감으로 짜 내는 데 드는 시간은 이전 노동 시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수직기를 사용하는 가련한 직조공은 전에는 하루 9시간 또는 10시간을 일했는데 이제는 17시간 또는 18시간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의 20시간 노동 생산물은 고작 10시간의 사회적 노동, 즉 주어진 양의 면사를 면직물로 바꾸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10시간의 노동만을 나타내 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20시간 노동 생산물은 이전 10시간 노동 생산물의 가치를 가지는 데 지나지 않았다.

만약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사회적 필요 노동량이 상품의 교환 가치를 규정한다면,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 늘어날 때마다 그 가치도 커져야 할 것이며, 또 그 노동량이 줄어들 때마다 그 가치도 작아져야 할 것이다.

만약 각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각 노동량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상대적 가치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란 없다.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은 사용되는 노동 생산력의 변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한다. 노동 생산력이 높을수록 주어진 노동 시간 안에 더 많은 생산물이 만들어지며, 노동 생산력이 낮을수록 같은 시간 안에 더 적은 생산물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만약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덜 비옥한 토양을 경작할 필요가 생긴다면 더 많은 노동량을 지출해야만 같은 양의 생산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이로 인해 농업 생산물의 가치는 커질 것이다. 다른 한편, 만약 어느 방적공이 현대적인 생산 수단을 이용해서 이전에 1노동일 동안 물레바퀴로 짜 낼 수 있었던 것의 수천 배에 이르는 면화를 면사로 만들어 낸다면, 파운드당 면화가 흡수하는 방적공의 노동은 이전의 수천분의 1이 될 것이며, 그 결과로 방적중에 파운드당 면화에 더해지는 가치는 이전의 수천분의 1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면사의 가치도 이에 따라 떨어질 것이다.

민족들마다 제각기 다른 본래의 힘과 후천적으로 습득한 작업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면 노동 생산력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첫째, 토양의 비옥도나 광산의 매장량 등과 같은 노동의 자연적 조건.

둘째, 노동의 사회적 힘이 점점 개선되는 것, 이것은 대규모 생산, 자본의 집적과 노동의 결합, 분업의 세분화, 기계, 생산 방법의 개선, 화학적 힘과 그 밖의 자연적 힘의 응용, 통신·교통 수단에 의한 시간과 공간의 단축, 그리고 과학으로 하여금 자연력을 노동에 봉사하도록 만들고 노동의 사회·협업적 성격을 촉진하는 그 밖의 모든 발명들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노동 생산력이 높을수록 일정량의 생산물에 투여되는 노동은 더욱 적어지며, 따라서 생산물의 가치는 더욱 작아진다. 또 노동 생산력이 낮을수록 일정량의 생산물에 투여되는 노동은 더욱 많아지며 따라서 생산물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그러므로 일반적 법칙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 시간에 정비례하고 사용된 노동 생산력에 반비례한다.

지금까지는 가치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으므로 이제는 가치가 취하는 특수한 형태인 가격에 관해서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가격은 그 자체로 보면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이 나라[영국]에서 모든 상품의 가치는 금의 가격으로 표현되지만 대륙에서는 주로 은의 가격으로 표현되고 있다. 금이나 은의 가치는 그 밖의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얻는 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국민적 생산물, 즉 여러분의 국민적 노동의 일정량이 결정화해 있는 일정량의 생산물을, 금과 은을 생산하는 나라들의 생산물, 즉 그들 나라 노동의 일정량이 결정화해 있는 생산물과 교환한다. 바로 이와 같은 방법, 사실상 물물 교환을 통해서 여러분은 모든 상품의 가치, 다시 말해 상품에 투여된 개개의 노동량을 금과 은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치를 화폐로 표현하는 것, 또는 결국 같은 이야기지만, 가치가 가격으로 바뀌는 과정을 더 상세히 관찰하면, 여러분은 그것이 모든 상품의 가치독립적이고 동질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과정 또는 그 가치를 같은 사회적 노동량으로 표현하는 과정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가격이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한, 가격은 아담 스미스에게서는 자연 가격으로,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에게는 '필요 가격'으로 불려 왔다.

그러면 가치시장 가격의 관계, 또는 자연 가격시장 가격의 관계는 어떠한가? 여러분은 모두 개별 생산자의 생산 조건이 아무리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시장 가격은 같은 종류의 모든 상품에 대해서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장 가격은 평균적 생산 조건에서 어떤 품목의 어떤 양을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평균적인 사회적 노동량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종류의 상품 전체를 기초로 산정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상품의 시장 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한다. 다른 한편, 시장 가격이 때로는 가치 또는 자연 가격 이상으로 오르거나 때로는 그 이하로 떨어지거나 하며 동요하는 것은 공급과 수요의 변동에 좌우된다. 시장 가격이 가치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흔한 일로서, 아담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 가격은......모든 상품 가격이 끊임없이 끌려가는 중심 가격이다. 여러 가지 우연적인 일들로 인해 상품 가격은 때로는 자연 가격보다 훨씬 높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이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상품 가격이 안정되고 지속적인 중심에 안착할 수 없게 방해하는 장애물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늘 중심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금 이 문제를 엄밀히 따져 볼 수 없다. 만약 공급과 수요가 서로 평형을 이룬다면 상품의 시장 가격은 그 자연 가격, 다시 말해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각각의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는 가치와 일치하리라는 것만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공급과 수요는 비록 하나의 동요를 다른 하나의 동요로, 상승을 하락으로, 또는 그 반대로 상쇄함으로써 이루는 평형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서로 평형을 이룰 수밖에 없다. 만약 여러분이 날마다의 동요만을 생각하지 않고, 예컨대 투크 씨가 그의 『가격의 역사』에서 한 것과 같이 더 오랫동안 시장 가격의 움직임을 분석한다면, 여러분은 시장 가격이 동요와 가치로부터의 이탈과 가격 등락 등이 서로를 무력하게 하고 상쇄한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논의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독점제나 그 밖의 몇몇 비슷한 형태로부터 받는 영향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모든 종류의 상품은 평균적으로 그 각각의 가치 또는 자연 가격으로 팔리게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장 가격의 동요가 서로 상쇄하는 평균 기간은 상품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상품은 다른 종류의 상품에 비해 공급을 수요에 적응시키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로 말해서, 또 다소 오랜 기간을 두고 볼 때 모든 종류의 상품이 그 각각의 가치대로 팔린다면, 이윤---개별적인 경우의 이윤이 아니라 다양한 직종의 항상적이고 통상적인 이윤---이 상품 가격에 덧붙음으로써, 또는 그 가치 이상의 가격으로 팔아서 생긴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은 그것이 일반화되었을 때 명백해진다. 누구든지 판매자로서 얻는 것은 언제나 구매자로서는 잃게 될 것이다. 팔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 또는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다. 이 사람이 생산자에게 지불하는 것을 그들은 먼저 생산자에게서 아무런 대가 없이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누군가가 먼저 여러분의 돈을 가져가고 그 뒤에 여러분의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그 돈을 되돌려 준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품을 그 사람에게 아무리 비싸게 판다하더라도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종류의 거래는 손실을 줄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결코 이윤을 내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윤의 일반적 성격을 설명하려면 여러분은, 상품은 평균적으로 그 실제 가치대로 팔리며, 이윤은 상품을 그 가치대로 팔리는 데서, 다시 말해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에 비례하여 팔리는 데서 생긴다는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이 전제에 바탕을 두고 이윤을 설명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역설처럼, 일상의 관찰과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이나, 물이 아주 연소되기 쉬운 두가지의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역설이다. 우리를 현혹하기 쉬운 사물의 겉모습만을 포착하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할 경우,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역설이다.


7

지금껏 거칠게나마 할 수 있는 데까지 가치, 모든 상품 가치의 성격을 분석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특수한 노동의 가치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나는 다시금 얼핏 보면 역설처럼 여겨지는 것으로 여러분을 놀라게 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모두 사람들이 날마다 파는 것은 자기의 노동이라는 것, 따라서 노동은 가격을 가진다는 것, 상품의 가격은 단지 그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일 뿐이므로 노동의 가치라는 어떤 것이 틀림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의미에서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상품에 결정화해 있는 필요 노동량이 그 상품의 가치를 이룬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이 가치 개념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컨대 10시간 노동일의 가치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노동일에는 얼마 만큼의 노동이 포한되어 있는가? 10시간의 노동이다. 10시간 노동일의 가치가 10시간의 노동 또는 그 노동일에 포함된 노동량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동어 반복일 것이며 나아가 무의미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일단 '노동의 가치'라는 표현의 참된, 그러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낸다면, 우리는 이 불합리하며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가치 적용의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단 천체의 실제 운동을 알게 되면 그 외관상의, 또는 단지 현상적인 운동을 설명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파는 것은 그의 노동 자체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그 처분을 자본가에게 맡기는 그의 노동력인 것이다. 영국의 법률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일부 대륙의 법률에서는 노동력 판매에 허용되는 최대한의 시간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것을 보아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노동력을 한정 없이 파는 것이 허용된다면 노예제가 곧바로 되살아 날 것이다. 또 만약 그것이 예컨대 노동자의 일생에 걸쳐 팔린다면, 노동자는 곧 그 고용주의 종신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영국의 가장 오랜 경제학자이자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 홉스는 일찍이 그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그의 모든 계승자들이 간과한 이 점을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인간의 가치 또는 값어치는 다른 모든 물건에서와 같이 그의 가격이다. 즉 그가 힘을 사용하는 데 대해 주어지는 것만큼의 값인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의 가치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시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토지·기계·원료·생활 수단 등, 미개간지를 제외한다면 모두가 노동 생산물인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는 구매자 집단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노동력, 즉 일하는 파과 두뇌 외에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는 판매자 집단이 존재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어떻게 해서 전자의 집단은 이윤을 남겨 돈을 벌려고 늘 사는 반면, 후자의 집단은 생계를 위해 늘 팔게 되느가? 이 질문에 대한 연구는 경제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선행적 또는 본원적 축적', 그러나 실은 본원적 착취라고 해야 할 것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라는 것이 노동하는 인간과 그의 노동 도구 사이에 존재하는 본원적 통일의 해체로 귀결된 일련의 역사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는 내 당면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 도구의 분리가 일단 확립되면, 그러한 사태는 계속 유지되며 나아가 끊임없이 규모를 키우면서 재생산될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 양식에서는 새롭고도 근본적인 혁명이 그것을 다시금 뒤집고 원래의 통일을 새로운 역사적 형태로 되살려 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가치란 무엇인가?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치도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한 사람의 노동력은 오직 그의 살아 있는 개체 속에서만 존재한다. 한 사람이 성장하고 삶을 유지하려면 일정량의 생활 필수품이 소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도 기계와 마찬가지로 마모되며,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양의 생활 필수품 외에도 노동 시장에서 자기를 대체하고 노동자의 대를 잇게 될 일정한 수의 자녀를 양육하는 데 또 다른 양의 생활 필수품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의 노동력을 개발하고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도 또 다른 양의 가치가 지출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교육비와 개발비가 얼마 되지 않아 평균 노동만을 고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서로 다른 질을 가진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각기 다르듯이 서로 다른 직종에서 고용되는 노동력의 가치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해 두어야겠다. 그러므로 균등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결쿠 이루어질 수 없는 어리석은 바람이다. 그것은 전제는 받아들이면서도 그 결론은 회피하려는 그릇되고 피상적인 급진주의의 산물이다. 임금 제도를 토대로 하는 한,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같은 방식으로 결정된다. 즉 이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는 서로 다른 노동량이 필요하므로 노동 시장에서도 노동력은 서로 다른 가격으로 팔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금 제도라는 토대에서 같은 또는 심지어 공정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노예 제도라는 토대에서 자유를 요구하는 것과 똑같다. 여러분이 무엇을 정당하거나 공정한 것으로 생각하는가는 논외의 문제다. 문제는 이렇다. 주어진 생산 제도에서는 무엇이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언급한 바에 따르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을 생산·발전·유지·영속화하는 데 필요한 생활 필수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www.marxists.org/korean/marx/value-price-profit/ch01.htm#c01

선진국이 부러운 진짜 이유

열린세상] 선진국이 부러운 진짜 이유

김종석 ((사)정부개혁연구소 소장, 홍익대 경제학 교수)


우리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두세배 높은 선진국 사람들 사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사는 집 크기나 소비수준이 우리보다 그다지 잘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특히 일본이나 유럽 사람들의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보면 더욱 그렇다.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일만달러 소득밖에 안 되었는데 이만달러 삼만달러 수준의 과소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왜 그런 것일까.

그러나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선진국 국민들도 누구나 더 많은 소득과 더 높은 소비수준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나 마찬가지다.다만 그들 나라의 가격구조와 경제제도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소비수준과 생활습관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혹시 그들이 저축을 많이 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측이다.감소추세에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높다.

다시 말해 선진국의 일인당 국민 총생산량은 평균적으로 우리의 두세배가 되지만 정작 국민 개개인이 소비할 수 있는 실질소득은 세금구조와 가격구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짓눌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그렇다면 그 나라 사람들의 물질적 풍요와 높은 삶의 질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선진국 국민생활이 우리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그들 나라에는 양질의 공공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공공재는 국민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사유재산과 달리 소득이나 신분에 차이를 두지 않고 국민 누구나 공동으로 함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설이나 서비스를 말한다.깨끗한 환경,공원녹지,잘 정비된 교통시설과 대중교통망,통신망,효율적인 행정조직과 사법제도 등과 같은 기반시설과 제도,공공서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특히 어떤 공공재는 그런 공공서비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의 복지수준이 상승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잘 발달된 사회복지 제도,의료제도,교육제도,응급 구난 시스템,경찰서비스 등은 직접 혜택을 누리는 국민은 많지 않지만 그런 서비스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체 국민의 생활의 질은 향상되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공재는 그 속성상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국민복지 증진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 상품이다.선진국 국민들이 정작 개인적으로 누리는 소비수준은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와 같이 잘 발달된 공공서비스와 기반시설,제도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누리는 총체적 소비수준과 생활수준은 우리의 몇배 이상이 되는 것이다.

주말이나 휴가철에 고속도로가 꽉 막혀 변변히 놀러가지도 못하고,갑자기 사고를 당했을 때 제대로 응급 치료도 못 받은 채 죽을지 모르고,수돗물을 믿지 못해 비싼 정수기를 설치해야 하고,대기오염 때문에 방마다 공기정화기를 달아야 하고,학교교육을 못 믿어 사교육비를 더 써야 하고,대중교통이 낙후되어 비싼 자가용으로 출퇴근해야 하고,억울한 일을 당해 경찰이나 법원에 들고 가 봐야 속 시원히 해결되지도 않고,주변에 온통 교통체증,끼어들기,무질서,쓰레기 공해뿐이라면 소득 수준이 이만달러 삼만달러가 된다고 해도 국민 삶의 질은 크게 향상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진정한 의미의 선진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국민총생산이 증가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양질의 공공재가 함께 갖추어 져야만 한다.이것은 물론 돈이 드는 일이고 선진국 국민들은 그런 공공재를 가지기 위해 기꺼이 큰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물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정부기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비효율적이고 무능한 정부조직으로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밖에 안 될 것이다.제대로 된 행정서비스와 정부기능 없이 선진복지국가가 될 수가 없다.앞으로 정부개혁의 초점은 국민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도록 공공재의 품질향상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2004-03-23 (오피니언/인물) 칼럼.논단 15면 05판 1861자 스크랩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속고 속이는 세상, 이유가 있었네 ` 치팅컬처 - Cheating culture (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

 

 

거짓으로 얼룩진 문화를 속 시원하게 파헤쳐 주는 21세기 문화 보고서

지금 우리가 디딛고 있는 이 사회!! 마주치는 수 많은 사람! 매스미디어 속의 이야기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사회.사람에 대해서 한 번쯤이면 누구나 의문을 품었을 사항 뿐만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적나라게 보여준다. 이 책은 논리적인 근거들과 신뢰성이 높은 실사례들을 말해주고 있어서 누구도 반론하기 힘들 것이다. 열정과 진실로 무장한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거짓과 사회.문화이다. 이 책이 가진 놀라운 이야기에 주목해보자!

 

속이는 자가 이기는 사회 시스템


정직과 윤리는 우리 사회의 큰 덕목이었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통해 정직해야 한다고 배웠다. ‘거짓말하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며, 악한 짓을 하면 당연히 벌을 받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권선징악 속 이야기처럼 달콤하지 않다. 엄청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고도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주변에 넘쳐난다. ‘탈세’ 혐의를 받은 기업은 여전히 굴지의 기업으로 대접받고, 학력을 속인 연예인은 단 몇 마디 반성의 말로 방송에 복귀하며, 주가조작과 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후보들이 부를 등에 업고 정치계의 스타로 등극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저자는 이의 원인을 바로 ‘속이는 자가 이기는 사회 시스템’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치열한 경쟁을 독려하는 극단적인 자유 시장경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시장은 자유의 핵심이자 번영에 이르는 가장 적절한 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과거 같으면 뻔뻔스런 탐욕이나 속임수로 간주되었을 행동이 쉽게 합리화되었다. 전에는 수익 창출, 비용 절감, 숫자 조작, 편법 사용과는 거리가 멀었던 많은 곳에서 자유시장의 힘이, 오랫동안 지속된 사회규범과 직업윤리를 밀어냈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그 힘에 스포츠계, 법조계, 재계, 교육계, 의학계, 출판계 등 여러 분야가 쑥대밭이 되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창의적인 파괴’였다. - 65쪽

자산의 규모에 따라 개인의 가치가 판단되는 사회에서 ‘정직’은 아름다운 이상일 뿐 현실에서는 ‘속임수’가 승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속임수가 발각될 확률이 점점 적어지고 설령 발각된다 하더라도 그 처벌은 미미하다. 그에 비해 속임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공의 열매는 너무나 크고 달콤하다.

인생의 2막을 사랑하는 미국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돈과 명성이 따라오면 과거의 죄는 편안하게 잊힌다.
- 318쪽

속임수, ‘승자 독식 사회’에서 살아남는 성공 키워드
캘러헌은 특정 부류의 예외적인 사람들만 속임수를 쓰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모든 사람들 사이에 거짓과 편법이 횡행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가 급속한 성장기와 침체기를 겪으면서 계층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특정 일부층에 부가 쏠리게 되면서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자가 된 사람이 얻는 열매는 더욱 커진 반면, 패자는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빠듯한 생활비로 연명하는 현실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승자가 되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속임수를 쓰지 않으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생겨난다. 이는 곧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다’라는 자기변명을 낳게 되며, 결국 많은 사람들이 ‘편법’, ‘속임수’라는 무기를 선택하게 된다.

널리 유행하는 규칙보다 우리가 세운 규칙에 따라 행동할 경우 삶이 고달파진다. 다시 말해 영웅이 되어야 한다. 영웅으로 사느니 속임수 문화에 편승하는 것이 훨씬 쉽다. 게다가 속임수가 일상화된 체계 안에 깊이 빠져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부패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기 쉽다. …중략… 속임수의 유혹은 매우 강하다. 속임수는 앞서나갈 수 있는 비밀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당한 이익 취득을 부담스럽게 여기지만, 경제적 압력에 처하거나 코앞에서 대롱거리는 당근이 충분히 클 경우 많은 사람이 양심을 저버린다. 사회 분위기 전반이 부정을 용인할 경우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 40쪽

사회 가치의 변화, 부패의 확산
얼마 전 일본 아소 총리는 고령자 의료비 문제에 대해, “몸 관리를 못해 골골거리는 사람들의 의료비가 왜 우리 주머니에서 나가야 하는가?”라고 발언해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진짜로 무서운 것은 막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의 이면에 깔린 실패는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는 승자 위주의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건은 캘러헌이 주장한 속임수의 증가가 초래한 세 가지 가치의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우선, 개인주의가 극심한 이기주의로 바뀐다. 둘째, 돈이 사람보다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셋째,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해진 반면 약자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삶의 패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이 권력형 사기를 당해 피해를 입어도 오히려 피해자 탓으로 돌린다. 예를 들어, 기업 스캔들이 터졌을 때 많은 논객이 엔론과 월드콤 등 부패한 기업에 투자했다 손해 본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엔론이 도산하자 한 대학생은 이렇게 평했다.
“평생 저축한 돈을 날린 투자자들은 어리석은 투자 결정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산을 분산해야 한다는 평범한 규칙을 따르지 않았거든요.”
언론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똑같이 되풀이했다. 엔론 직원들이 회사 주식을 떠안고 401(k)에 묶여 있는 동안 최고 경영진은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처분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을 때조차도.


캘러헌은 역사적으로 1960년대의 반물질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에서 점차 자유로운 경쟁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가 되면서, 부의 불평등은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를 부여하는 순기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말한다. 부는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상이었으며, 사람들이 돈을 버는 데 치중하는 것이 오히려 미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수익을 얻기 위해 더욱 인색하고 야비해졌고, 그 결과로 개인주의는 기존 사회규범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결국 많은 사람이 다른 의무보다 자신의 욕구를 맨 위에 올려놓게 되면서, 지역사회나 가족, 정치 생활과 관련된 공동의 목표나 공동체의 가치는 점차 그 자리를 잃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화의 가치는 전쟁이나 평화, 호황과 불황, 인구 변동과 과학기술의 변화 등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대세에 의해 주로 정해진다. 가치는 또한 사회운동, 종교적 각성, 지식인의 행동주의, 특정한 생활 방식을 목청껏 주창하며 유행을 선도하는 사회 저명인사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여기에 대중 언론까지 등장하면서 사회의 가치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빨라졌다. …중략… 돈과 지위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출세하기 위해 부정직하게 편법을 동원하는 행동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갈수록 고조되는 추세다. 돈과 경력이 관련될 경우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잘못된 선택도 서슴지 않는다. - 135쪽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되려면 사람들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는 사회계약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사회계약이 사회 전반에 걸쳐 공정하게 적용된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고, 규칙을 깨는 사람들은 상을 받을 때 사회계약은 그 효력을 상실한다. 캘러헌은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체계가 자신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할 경우 윤리관을 쉽게 바꾸는 경향이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승자가 되면 정치권력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속임수가 횡행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경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20년간 부유층은 다른 계층과 비교해 엄청나게 더 부유해졌을 뿐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정치 영역에 부를 투자해왔다. 부자들은 정부 모든 부처의 법과 각종 규제에 영향을 미치며 부를 사용해 속임수가 용인되도록 법을 왜곡하고, 법을 고쳐 속임수를 적법한 행동으로 둔갑시키고, 속임수가 덜미를 잡혀도 처벌받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체계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보상을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오늘날의 기업 문화는 극심한 수준의 경쟁을 요구하고 또한 미화한다. 그런 가운데 성공하는 계층은 중요한 분야에서의 정부 규제를 무력화하며 경제적 살인을 저질러놓고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법을 뜯어고치고 있다.

속임수 문화에서 빠져나오기
캘러헌은 속임수는 결국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좁혀지지만, 이러한 선택은 문화·정치·경제의 영향력에 많이 좌우된다고 말한다. 정직하게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 속임수를 쓰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을 너무나 쉽게 합리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캘러헌은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1. 새로운 사회계약 마련 : 속임수는 불평등과 경제적 불안이 지배하는 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따라서 이러한 근본 원인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계약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누구나 앞서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똑같은 처벌을 받는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며, 우리 모두는 똑같은 ‘윤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저마다의 분야에서 결실을 거두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회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2. 새로운 차원의 성과주의 확립 : 속임수 문화를 근절하려면 밖으로는 정부의 압력과 안으로는 내부 개선을 통해 기업과 전문직 업계를 개혁해야 한다. 아울러 민간 부문은 너무나 자주 부정직을 조장하는 편협한 성과주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기업 스스로가 윤리 지침을 정하고 내부적으로 감시해야 하며, 수익만으로 결과를 판단하는 풍토를 바꾸어야 한다.
3. 윤리 교육 강조 및 강화 : 다음 세대가 좀 더 윤리적인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으려면, 오늘날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속임수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어릴 때부터 개인의 이익을 뛰어넘어 원칙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인성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성 교육을 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속임수는 불평등과 경제적인 불안이 지배하는 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속임수는 정부가 부자들의 이익에 휘둘려 공명정대하게 정의를 실현할 의지가 부족한 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속임수는 돈과 성공이 왕이고, 승자는 매일 권력을 남용하더라도 무조건 대접받는 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속임수를 줄이려면 이러한 근본 원인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 모두 한 배에 타고 있다는 믿음을, 우리 모두 똑같은 ‘윤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저마다의 분야에서 결실을 거두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회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서문

1장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다
2장 속임수를 조장하는 자유시장
3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4장 인격의 문제
5장 유혹의 나라
6장 부패의 확산
7장 출발선에서의 속임수
8장 죄는 잇고 처벌은 없다
9장 속임수 문화에서 빠져나오기

후기
자료 출처
주석
색인

 

 

데이비드 캘러헌 [저]

공공정책 연구기관인 데모스(Demos)의 공동 설립자이자 수석 연구원이다. 이미 다섯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유에스에이 투데이》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에 글을 게재해왔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뉴욕 시에 살고 있다. www.cheatingculture.com을 방문하면 사람들이 행하는 거짓과 편법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강미경 [역]
이화여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인문교양ㆍ비즈니스ㆍ문예 등 영어권의 다양한 양서들을 번역 소개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이너프: 불만족의 심리학][유혹의 기술][멘사 논리 퍼즐][치팅컬처][헷갈림 방지 사전] [다르게 생각하라]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내가 만난 희귀동물][야성의 엘자][허기진 두뇌를 위한 지식의 통조림][심심한 두뇌를 위한 불량지식의 창고][몽상과 매혹의 고고학] 등 여러 권이 있다.

 

 

진정 원하는 일을 1만 시간 동안 투자하라

1만시간의 법칙을 기억하라


세계적인 베스트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 최근 쓴 <아웃라이어>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언급한다. 모차르트가 21살 때 세계적인 걸작으로 평가받는 고향곡을 쓰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11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년동안 매일 3시간씩 꾸준히 자신을 단련시켰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전문가로 되기 위해서 필요한 매직넘버를 1만 시간으로 보고 있다.

 

"아이폰 속도 느린이유 있었네" KT 업로드 인위적 제한… 내달부터 경쟁사 수준 상향

KT가 아이폰의 3G 데이터통신 업로드 속도를 제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이폰 사용자들의 불만이 잇따르고 있다. KT는 내달부터 업로드 속도를 경쟁사 수준으로 올릴 계획이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KT는 지난해 11월 국내에 아이폰을 도입하면서 3G(세대) 이동통신망의 데이터 업로드 속도를 아이폰에 한해 64kbps(킬로비트)로 제한한 것으로 드러났다. 통상 3G WCDMA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 이동통신망의 다운로드 속도는 14.4Mbps, 업로드 속도는 384kbps 수준이다.

하지만 KT는 아이폰 가입자 증가로 기지국과 중계기 등 이동통신 장비에 부하가 늘 것을 우려해 설비 투자 대신 기준 속도보다 6배가 느린 64kbps로 업로드 속도를 제한했다. 64kbps는 과거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의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실제 통신환경에서는 50kbps에 불과하다. 현재 SK텔레콤은 아이폰에 대해 128kbps의 업로드 속도를 제공하고 있다.

네이버 스마트폰 커뮤니티의 한 네티즌은 "트위터에 2메가바이트(MB) 용량의 사진 파일을 하나 올리려면 4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돼 사진 올리기를 포기했다"며 "다른 스마트폰으로는 문제가 없어 아이폰만의 문제로 생각했는데 KT가 인위적으로 속도를 제한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용자들의 불만이 잇따르자 KT는 다음달 1일부터 아이폰의 업로드 속도를 128kbps로 상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KT가 스마트폰을 비롯해 노트북, 태블릿PC 등을 중심으로 한 휴대기기에서 무선인터넷을 이용하는 테더링(tehering) 서비스를 대대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힌 상황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특히 휴대폰 사용자의 기본 권리인 통신속도를 인위적으로 제한했다는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을 전망이다.

KT는 이번 속도 제한이 3G 이동통신망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사용빈도가 덜한 업로드의 속도를 제한하는 대신 사용자들이 많이 쓰는 다운로드에 가용자원을 배분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국내 통신장비 업계의 한 관계자는 "비동기식(WCDMA) 3G 이동통신망에서 다운로드와 업로드의 데이터 부하량은 별개로 처리된다"며 "다운로드 속도를 위해 업로드 속도를 제한했다는 설명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사건은 국내 이동통신사들의 향후 설비투자 전략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스마트폰 가입자의 확산에 따른 3G망 사용량 증가는 이동통신사들에게 가입자 확보와 설비투자라는 고민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스마트폰의 확산은 이동통신사의 새로운 고민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2위 이동통신사 AT&T는 아이폰 사용자를 대상으로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무료로 내놓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사용량 폭증으로 각종 통신장비에 부하가 늘면서 골치를 앓고 있다. AT&T는 아이폰을 통한 테더링 서비스 역시 비슷한 이유를 들어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